안경환 전임 위원장이 어떤 분인지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피상적으로 아는 부분만으로도 그 분이 공직을 맡기에 훌륭한 인격과 재능의 소유자라고 감히 평가한다. (혹은 그 인격과 재능이 공직을 맡기에 너무 훌륭한 분인지도 모르겠지만, 인권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서 그 정도의 과도함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그 후임은 원래 누가 되더라도 잘해야 본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인권위는 전 정권의 유산이었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안 위원장이 임기를 마치지 않고 사임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또한 현 정권과 그 지지자들은 인권위를 (도매금으로 여성부라든가 다른 기관들까지) 평가절하하고, 약화시키거나 폐지시키는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새로 임명된 현병철 위원장이 야당 쪽의 매체에 의해서 벌써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임명 소식을 듣자마자 여러 단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권위가 1대 위원장만에 폐지되지는 않겠군', '그래도 대통령의 측근이나 강경파를 임명해서 (사실 이런건 확신적 보수주의자들의 전매특허인데) 내부적으로 개박살내지는 않으려나 보군', '나름 중립적인moderate 인사를 한 것을 보니, 천성관 사건에서 배운 교훈이 아직은 남아있나 보군.' 등등. 현병철씨가 신임 인권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느낀 기분은 대체적으로 약간의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인터넷을 중심으로 시작된 현병철 때리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일부는 천성관 낙마라는 현 상황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과연 현병철씨가 인권위원장에 그렇게 부적절한 인물인 것일까? (물론 검증이 시작되면 뭐가 터져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헌법이 명시적으로 엽관주의를 부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통령제의 국가에서 정권의 부침에 따라 임명직 고위공무원이 교체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그것이 행정부 바깥의 공직이라면 더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대통령의 유산 Legacy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춘 인물이어야 되겠지만, 보수주의 정권의 대통령이 보수주의자를 대법관이나 헌재재판관이나 감사원장에 임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진보주의 정권의 대통령이 그럴 수 있고, 그렇게 해온 것처럼 말이다. 인권위원회 위원장이 비정치적인 자리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까닭에 나는 그나마 이명박 대통령이 현병철씨 정도로 중도적인 사람을 임명했다는 사실에 매우 안도했다. 현병철씨는 당파적이지도 않고,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도 아니고, 그냥 '학자'다. (뛰어난 학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안경환 전임 위원장은 뛰어난 헌법학자였나?) 민법학자라고 까이는 것 같은데, 이 나라에서 연예인이 장관에 임명된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니 전공은 덮어두는게 좋을 것 같다. 비전문적이라는 것이 약점은 되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인권위라는 기관에 대한 야당측의 혹은 진보진영의 인식 안에 있다. 그들은 국가인권위라는 기관을 굉장히 초당파적이고 중립적인 기관이라고 보고 (아마 여성부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심지어 그 수장을 임명할 때는 인권과 관련된 인물 - 궁극적으로는 인권활동가를 임명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문제는 그 기준이라는 것이 현 보수주의 정권은 물론 나 같은 사람 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대법관이나 헌재재판관을 임명할 때조차 정파적인 관점에서 선호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임명하는데, 왜 인권위원장은 예외인가? 인권이나 여성(사실 여성부는 양성평등과 가족 정책을 다룬다)이 오직 진보진영 혹은 민주당 혹은 좌파의 가치일 뿐일까. 그럴리가.

 진보진영 지지자(혹은 민주당원 혹은 리버럴 혹은 인권운동가 혹은 좌빨)는 여성부 장관이나 인권위원장에 좀더 그 분야에 '전문적이고' 그러나 '우파지향인'(혹은 한나라당원 혹은 보수주의자 혹은 뉴라이트여성연합 혹은 북한인권시민연합 혹은 우꼴) 인사가 임명되는 것을 보면 뭐라고 논평할지 모르겠다. 비전문가라고 소리칠 것인가. 사실 한나라당 쪽(혹은 보수진영 쪽)에는 종교계를 제외하면 이런 직책을 맡길만한 인재풀이 적고, 더구나 괜찮은 후보로서 검증을 거쳐서 살아남을 만한 인물의 경우에는 투입해야 할 곳이 많으니 아직은 중도적인 인물에게 자리를 주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현 정권이 인권위원회를 그저 떠들썩한 위원회 중 하나쯤으로 취급하고 싶어한다면 하찮은 뼈다귀라고 생각해도 별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보기엔 현병철씨 정도라면 청와대가 큰 희생 없이 그리고 큰 소란 없이 넘어가기 위한 작은 양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도 많은 것 같으니.

 하지만 원래 대통령이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면 (그리고 최소한 지지율이 45% 이상만 나왔다고 한다면) 다수당까지 쥐고 있는 이 정권에서 인권위원회를 양보할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 매력적인 후보가 될까? 북한 인권에 대해 지대한 관심과 열렬한 활동을 벌여오신 서경석 목사는 어떤가. 끔찍하지 않나? 나는 그 꼴을 안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지금 여성부 장관인 변도윤씨만 하더라도 무색무취한 인물이지만 YWCA 출신에 뉴라이트 전국연합 계열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병철 정도면 그보다는 훨씬 낫지 않는가. (지지율 50% 이상이었을 때 여성부 장관으로 변도윤을 찍은걸 보면, 확실히 지지율이 떨어지는게 아무런 효과가 없는건 아닌거 같다. 물론 변도윤씨가 여성부 장관으로서 활동을 얼마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악평을 하진 않겠지만. 어차피 뭐 여성표 빼면 폐지 안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정권이니까.)

 별론으로 2007년말까지 한나라당에서 줄기차게 요구해온 것 중 하나가 바로 인사청문회법 개정이었다. 그 개정의 골자는 인권위원회, 부패방지위원회 등 핵심 대통령(총리)직속 위원회의 장과 위원들에 대해서도 인사청문절차를 거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장관급이니까) 특히 인권위원회가 이른바 '신념적 보수주의자'들의 만년 공격대상이었다. 송두율 사건 때, 그리고 이라크 파병 때 국가인권위원회의 좌빨 망동에 대해 늘 들고 일어난 것도 한나라당이었다. 자아, 이제 정권이 바뀌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마음껏 요리할 수 있게 되었는데 - 한나라당의 인사청문회법 개정에 대한 입장은 어떻게 되었는지? 내가 알기로는 민노당이 이제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 같다.

 또다른 얘기지만, 어쨌건 보수진영의 굳건한 믿음을 가진 분들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완전히 방기할 것 같지는 않다. 대외적 풍파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일단은 중도적인 장을 임명했다고 하더라도, 인권위원들은 확실히 장악하지 않을까. 서경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 우리는 한기총 목사님들이 국가인권위원회 상임 혹은 비상임위원이 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게다. (하기사 조국 교수 같은 진성좌파도 비상임위원을 했는데 서경석 목사같은 이가 몇 년 해먹으면 안될 이유도 없긴 하다)
Posted by 말을 조심하는 措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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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추가] 사실 ICC 문제까지 생각한다면 정인섭 서울대교수가 상당히 유력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현 정권의 코드와도 맞지 않고, 또한 너무 서울대 법대 색채가 짙어지는 문제도 있으니 - 테이블에 올라오지도 못하는 카드가 되어버렸다. 뭐 어쩔 수 없지.

    2009.07.18 21:2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루시앨

    온건한 자유주의자를 쫓아내고 강경 보수주의자를 불러온 것은 사실 급진적 진보론자들이란 경구가 잠시 생각나네요. 잘 봤습니다.

    2009.07.19 23:45 [ ADDR : EDIT/ DEL : REPLY ]
    • 아니 뭐 극단주의자들이 치킨게임을 하다가 말아먹었다 정도까지 생각하는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진보 쪽은 임명직 고위공무원의 엽관주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는 생각을 합니다.

      2009.07.21 22:21 신고 [ ADDR : EDIT/ DEL ]
  3. 안도하는 것과 별개로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야 이번 선택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긴 합니다만(그 점은 동의합니다), 현 인권위원장 선정의 문제가 어떤 불가피한 제약이 가해져서 생기는 것도 아닌데, 타당성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현재와 같은 비정상적인 조건을 굳이 염두에 둬가며 내용를 조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10인 내외의 시민단체에 관여하는 위치에만 있더라도 역할에 따라 말을 조율하겠지만, 갑남을녀의 발화가 필요 이상으로 정치적일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2009.07.20 11:06 [ ADDR : EDIT/ DEL : REPLY ]
    • 음...이 글 역시 그냥 갑남을녀 중 한 사람이 생각하는 의견일 뿐입니다. 다만 대통령제 하에서는 임명직 고위공무원에 본질적으로 엽관주의가 통용되는 법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좀 이해했으면 좋겠다고나 할까요...

      여담이지만, 현병철을 때리는 것은 '전선을 세운다' 혹은 '각은 세운다'는 전략전술이라는 식으로 접근하시는 분들도 계시는거 같더군요. 이런 접근이야말로 "필요 이상으로 정치적인" 것이겠지요.

      2009.07.21 22:24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