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계승자 (제임스 P. 호건 이동진 역, 오멜라스, 2009)

 놀라움과 경이로움은 다른 감정일까요. 옮긴이의 말에서 '경이감 sense of wonder'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에 그 말만큼 적합한 단어도 없을 것 같습니다.
 
 사전적으로는 비슷한 뜻이지만 '경이로움'이 쥐고 있는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 특별한 감정에는 오관과 지성 양 쪽에 가해지는 거대한 부하가 걸려 있습니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은 답보다 수수께끼를 찾아내는데 압도적인 재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만, 범속한 사람이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을만한 의문들에는 이미 선인의 잇자국이 나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잇자국들을 주마간산으로나마 암기시켜 찍어내는게 의무교육이니, 현대인에게 이 세상은 '놀랄 일'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르겠지만 반비례하여 '경이로운 일'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화성악 상의 모든 화음은 다 작곡되었고, 컴퓨터 그래픽 이상으로 경이로운 처녀지도 지구상에 없고, 교양 수준의 과학 지식을 가진 성인에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수준에서는 더 이상 과학의 미스터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나뭇가지에 붙은 불씨를 경이로운 눈으로 올려보았던 베이징 혈거인과 오늘날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인에게 활자만으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려면 얼마나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꾸며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한 두 달 전이었던가요. MBC 다큐스페셜을 통해서 서울대공원 유인원관을 다룬 프로그램이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는 서울대공원 공인 천재라는 침팬지 '진주'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지요. 겨울철 쉘터 안에 갇혀 지내는 '진주'는 나무껍질을 벗겨서 전열기구의 안전망 사이로 껍질을 집어넣어 달궈진 전열기 코일로부터 불을 피워냅니다. 그리고 불장난을 하지요. 투박한 손과 엉성한 몸짓으로 불을 끄집어내고, 두꺼운 손가락으로 화기를 죽여 불씨로 만들어 그 열과 훈향을 즐기는 모습이라니. '진주'의 그 숙명적인 발견 혹은 놀이를 보며 시원적인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사실 그 경이감은 이미 백여 만년 전 원인이었던 우리 선조들이 느꼈던 것이겠지요. 제가 느낀 경이감은 아마 '진주'가 처음 불을 '사용하게 된' 날, 그녀가 느꼈을 경이감에 감정 이입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별의 계승자"를 읽고 느끼게 된 경이감도 결국 이런 감정 이입입니다. 다만 '진주'의 경우와 달리, 이 감정이 이입된 대상은 현실도 아닌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하니 조금 허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허구의 소설을 가지고도 이 정도의 경이감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마치 논픽션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고,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이야기'로부터 경이감을 끌어내는 조금은 허무한 추체험 - SF의 본질적인 막막함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해볼까요? 사실 현실도 아닌 꾸민 이야기로부터 '경이감'이나 '지적 자극'을 얻는단들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의문은 비단 저 같이 비뚤어진 사람만이 느끼는게 아닐성 싶습니다. 그러니 과거 SF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폄하(!)하여 일컫기도 했겠지요. 하지만 "공상"조차도 경이로울 수 있고, 현실에서 사라져가는 경이감을 누대에 걸쳐 이어줄 수 있다는 것이 "서사"의 위대함입니다. 

 아폴로 프로젝트를 다룬 HBO의 드라마 From the Earth to the Moon (1998)은 그런 "경이"와 "공상"을 잘 담고 있는 서사의 좋은 일례입니다. 이 드라마는 프로듀서로서의 톰 행크스를 논하거나, HBO 드라마 혹은 희대의 걸작 Band of Brothers의 원류를 찾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작품을 예전부터 리뷰하고 싶었지만 엄두가 안나서 지금까지 미뤄온 것은 개인적으로 좀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 자체는 조금 오래되기도 했고, 원작이 논픽션이라 극화하기도 어렵고, 아폴로 프로젝트 자체가 지극히 미국적인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혹은 우리나라에서 우주와 과학은 상업적으로 그다지 재미를 볼만한 소재가 아니기 때문에)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HBO being HBO. 방과후 과학 교실 교보재 수준의 플롯만 있어도 이 정도 퀄을 문제 없이 뽑아내는 드라마 제작 능력...이 무려 1998년부터 작동 중) 

 사실 Executive Producer 톰 행크스는 이 작품 곳곳에 출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하고 있는 부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다. 그 정도로 From the Earth to the Moon은 논픽션에 가깝고, 조금 딱딱하고, 극적인 부분도 (각색과 연출의 측면에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시기의 톰 행크스는 프로듀서라기보다는 영화 "아폴로 13호"의 주연이었던 전성기의 배우에 더 가까운 캐릭터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조르주 멜리에를 깜짝 등장시켜서 From the Earth to the Moon의 주제 의식부터 굳이 이 작품을 프로듀싱하는 자신의 입장까지 대변시킨 에피소드 12편에 이르서는 그의 재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행여 딱 "아폴로 프로젝트"의 재연 배우 수준에 머무를 뻔했던 전체 드라마가 12편에서는 확 아로마를 피워냅니다. 다소 설교조인 느낌이 있지만, 조르주 멜리에와 그가 극화한 쥘 베른의 '달세계 여행'을 끄집어내어 "아폴로 계획"의 의의를 살려냈습니다. 겸하여 From the Earth to the Moon의 의의까지도 드러낼 수 있었으니 금상첨화지요.

 하드 SF는 플롯과 드라마가 약해질 수 있지만 대신 경이감을 구현하는게 용이한 소장르인듯 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정직하게 직구 승부를 한 작품도 드물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반쯤 클래식 반열에 올라간 이 작품 자체의 가치도 뛰어나지만, 이 작품의 특색이 많은 창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것도 간과하긴 어렵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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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말을 조심하는 措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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