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년 만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가장 최근에 봤던 것이 '전우치'인지 '드래곤 길들이기'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밖을 드나들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리적으로 영화관은 좀더 거주지에 가까워졌는데, 현실적으로 더 발걸음이 줄어든 것은 민생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어쨌든 어둡고 사람 많은 곳에서 화장실도 못가고, 좁고 불편한 의자에 (상대적인 개념입니다만 이제까지 넉넉한 사이즈의 편한 의자를 구비한 영화관은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민생 문제가 아닌 생체적 문제와 관련이 있겠군요) 2시간 가량 몸을 구겨넣고, 부적절한 실내 온도에 땀을 흘리며 (이 역시 남들과 다른 신진대사를 탓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건너뛰기 버튼이 없는 상태로 타인의 서사 속도에 속박당한 채 영상을 보는 것은 너무도 피곤한 일입니다. 그 희생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대체 어느 시대의 고행 내지는 피학대음란증일까요. 사회적 교류를 위해서 그 고행을 무릅쓰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여간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그 고통을 감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제 영화를 본 것은 일종의 세레머니라고 생각하는데, 영화를 고른 방식은 일종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전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인근 영화관에 상영중인 영화는 8개 -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친구와 연인 사이'는 아마 초대권을 받았더라도 보지 않았을 정도로 제 취향에서 벗어나는 영화입니다. '만추'는 이런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판에 개봉시킬 수 있었던 제작자의 용기가 하늘에 닿아, 한창 촬영 끝내고 편집을 할 와중에 "시크릿 가든"이 흥행 대폭발을 하면서 현빈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크릿 가든"을 보지도 않았고, 탕웨이를 감상할 수 있다는 메리트만으로 영화를 볼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라푼젤'은 집 근처에 3D 상영관이 없는 처지이고 (사실 멀티 플렉스라고 하기도 민망할만큼 작은 규모에 지저분한 영화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강 18호' 지뢰를 밟았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고.) '생텀' 역시 3D영화를 일반 상영관에서 보기 싫었을뿐만 아니라 '언노운'과 더불어 그다지 신선하지 않은 시놉시스가 식욕을 딱 떨어트리는 타입의 영화입니다. '아이들'은 세레머니용 영화로 보기엔 가볍지도 않고, 이미 한때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에 굉장히 열중했던 기억이 있는지라 새로운 흥미는 생기지 않는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구멍은 다 막혔기 때문에 이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심정으로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을 택했던 것입니다. 400만 관객의 기록은 그 선택의 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최소한 문화적 경험을 공유하고 나면 화제거리 하나는 더 보유할 수 있는 보너스가 있으니까요. 대개의 선택이 그렇지만 이렇게 안일한 마음으로 행한 일들은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하는 법입니다.

 과거 '전우치'에 관한 리뷰 포스팅에서 저는

한국 영화계에서 쓸 수 있는 최고의 조연진을 썼고, 감독도 노력했고, CG도 나쁘지 않았는걸. 강동원은 여자관중의 눈에 임수정은 남자관중의 눈에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수익을 올릴 것 같고 (하지만 영화 오프닝 직전에 줄줄이 나오던 창투사 목록들을 보려니 약간 걱정도 되긴 하더라) 해외에서도 팔릴 수 있을 거 같다. 영화 안에서의 대사처럼 "이거 찍어서 깐느 가려는 건" 아니니까.

라고 썼습니다. '전우치'는 강동원, 임수정이라는 배우를 주연으로 썼고, 100억대의 제작비를 들여, '아바타'와 싸워야했던 영화였습니다. 혹자는 최동훈 감독이 이 정도의 오락 영화밖에 뽑지 못했다는 점에 실망했겠지만, 이미 영화라는 상품이 투자사의 막대한 이해관계가 걸린 수익 사업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감독과 제작자가 소유한 모든 부동산 자산의 담보가액 이상(대박을 몇 번 터트린 중견이라면 한 20억? 30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는 "만들고 싶은대로" 만들 수도 없고, 만들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비즈니스라는 것이겠지요. 돈 벌려고 만드는거지, 깐느 가려고 만드는건 아니니까요.

 하물며 '조선명탐정'의 감독은 '올드 미스 다이어리' 외에는 뚜렷한 성과도 없는 김석윤 감독입니다. 제작비는 마케팅 비용을 빼고 44억이라는 소액(?)이지만, 제작자도 실로 마이너하고 몇 년의 공을 들인 프로젝트이니 쉽게 찍은 영화는 아니라고 봐야 할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관중은 한 300만 정도만(!) 동원해도 좋으니까, 제 필모그래프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찍고 싶고, 운이 좋다면 국제 영화제에도 초대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싱긋)"이라는 몽상은 애초에 떠올릴 여지가 없습니다. 최대한 흑자가 나도록 찍어야 했을거고, 실제로 그렇게 찍어서 내놓은 결과물이 이 영화인듯 싶습니다.

 하여 '조선명탐정'은 김명민의 호연이 돋보이고, 매력적인 원작도 썼고, 부분 부분 번쩍거리는 영감이 눈에 띔에도 불구하고, 실로 가혹할정도로 진부하고 뻔한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중에 어필하는게 중요하긴 하지만 정도라는게 있지요. 천주교 박해와 엮인 후반의 감동 코드는 영화 제작자가 일본 수출까지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감성의 비위를 자극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 젊은 관객의 감성에는 딱 "손발이 오그라든가"는 핀잔을 받을거 같은데, 그런 연출을 꼭 섞어넣었어야 했는지. 얼마나 제작자가 타겟층을 넓게 잡고 있는지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추리물로서의 가치는 따지지 않도록 합시다. 제목과 달리 이 작품은 버디 코미디이고, 약간은 스릴러인 수준의 작품입니다. 원작의 미스터리적 깊이가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감독은 복선과 증거를 언뜻언뜻 비추어주긴 했지만 그보다 김명민이라는 정극 배우를 가지고 얼마나 코믹한 상황을 자주 만듦으로써 그 갭으로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상당히 현명하고도 안일한 연출이었죠. 과연 감독은 역량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까요?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활용도는 딱 "베토벤 바이러스" 수준이 아니었나 하는 감상입니다. 

 어쨌든 이 작품은 올 겨울의 승리자이며, 투자자나 제작자에겐 큰 성공이었고, 감독은 모르겠지만 (제가 제작자라면 쉽게 다음 프로젝트를 맡기지 못할거 같아요. 혹시 모르죠 감독은 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었던 작품이었는데 투자자나 제작자의 개입과 간섭이 영화를 망친 것이었는지도) 김명민이라는 배우에게는 필모 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영화판 흥행과 별다른 연이 없던 배우가 한건 올렸으니까요.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위 모든 승리자들에게 패배한 관중이 된 기분이 듭니다. 관념적으로 정의된 관객층이라는 표제 하에 마케팅적으로 열심히 연구당해서 만들어진 '소비자'로 취급되어, 딱 그에 걸맞는 수준이랍시고 안일하게 제작된 영화를 본 기분이 드니까요. 일반 대중의 1인으로 취급받았다고 원한을 품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제작자나 감독이 상정한 수준이 제 기준에는 턱없이 미달이라 좀 분합니다. 그런데 400만이라는 흥행 성적을 보면 그 분석이 잭팟을 터트린 것이 확실해보이니, 두 배로 열을 받게 되는군요.

 상기 목록과 달리, 원작자에게까지 유감을 품게 만드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만, 김탁환씨는 이미 과거에 여러 작품을 통해 실망감을 안겨준 작가이기 때문에 새삼 이미지가 개선될 여지는 없습니다. 결국 원작자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유감스러운 작품을 보고 말았던 것일까나.


(이하는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p.s. 약간은 트리비아가 되겠지만 돌아와서 찾아보니 각시투구꽃은 실존하는 식물이었습니다. 학명은 Aconitum monanthurn 미나리아재비목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은 산의 냇가나 습한 그늘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특산종으로 백두산, 관모봉, 설령 등 함경도 일원에 분포하며, 높이는 20cm 정도이고 7~8월에 자주빛이 도는 보라색 꽃이 줄기 끝에 1~3개 정도 핍니다. 유독식물이며 북한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희귀종이죠. (출처는 naver 백과사전. 강조는 필자)

 ...이건 뭔가, 강조된 부분을 읽고 영화의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면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듭니다.

 -영화 속에서 각시투구꽃을 재배하던 곳이 습한 곳이던가? (라기보단 차라리 양지바른 언덕)
 -영화 속에서 재배되던 그 식물이 높이가 20cm였던가?
 -미나리아재비과의 다년초를 작물로 재배하던가? 이게 약용이던가?

 무엇보다 주인공이 활약하던 적성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 조선시대의 적성현 밖에는 걸맞는 후보지가 없습니다. 한성에서 한 100여리 떨어진 곳입니다. 주인공이 주상께 인편을 보낸 것도 그렇고 (다 늙은 노비가 도보로 전하러 가죠) 임금님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 것도 그렇고 도저히 함경도라고 생각할 수 없는 지형도 그렇습니다. 한객주와 김씨가 쪽배를 타고 흘러 내려간 강이 임진강이라고 하면 아귀가 맞습니다. (그런데 파주에 저런 절벽이 있었을라나?) 더구나 판서와 같은 훈구의 양반 일가가 사는 본거지가 도성 인근의 경기 지역이 아니라 궁벽한 함남, 함북의 절지일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따라서 놀랍게도 영화 속의 그 작물은 절대로 "각시투구꽃"일 수 없는 것이지요. 각시투구꽃과 매우 흡사하면서 훨씬 더 높이 자라고 재배까지 되는 작물이 있습니다. 더구나 더욱 유명한 유독식물이지요. 바로 투구꽃이 그것입니다. 같은 미나리아재비과의 다년초로 학명은 Aconitum jaluense, 학명에서 알 수 있듯의 북방의 식물이지만 속리산 이북에서도 자란다고 하니 능히 파주도 재배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유명한 약재로서 조선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오래전부터 광범위하게 그 효능이 인정되어온 식물이기도 합니다. 다만 야생초로 채집되는 거라면 모를까 영화 속 내용처럼 특용 상품 작물로 마구 재배되었을지는 잘 모르겠군요. (어차피 원작자부터가 고증 따윈 무시하는 양반이지만)

 왜냐하면 이 식물의 가장 대표적인 효능은 사약이었거든요. 아무리 동아시아권에서 사약이 일반적인 처형 방식이라곤 하지만 이 약재를 막 상품 작물로 재배할만큼 사약 사발이 마구 돌아다니지는 않았을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이 투구꽃이 바로 바곳, 늑대 뿌리, Monk's hood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부자(附子)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투구꽃의 뿌리가 사약의 주원료인 한약재 부자입니다만. 아무리 약재라지만 왜 하필 부자를 재배했는지는 참 알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이 부자의 성분은 아코니틴계 신경독인데 신경 세포의 아세틸콜린 수용체에 반응하여 아세틸콜린에 의한 정상적인 신경 전달을 방해하는 기전으로 복용자를 죽이게 됩니다. 먹거나, 혈액 속에 주입하면 되는 것이죠. 더구나 피부로도 흡수되는데 치사량은 4mg (...) 역시 주인공들은 참 튼튼하군요. 참고로 원작에는 투구꽃 재배에 관한 내용은 한 줄도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뭐하러 이런 고증 무시의 소재를 과감히 영화에 집어넣었는지가 의문인데, 감독의 영상 미학을 담기 위한 소재로서 이만한게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투구꽃 따윈 기억도 안나고 오로지 한지민씨의 아슬아슬한 옷차림만이 떠오르니 한심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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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말을 조심하는 措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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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도림 CGV 가보세요. 거기 의자 저에게 편했으니 아마 편하실 겁니다.
    최근에 저는 [라푼젤]을 보았죠. 그냥 들어가려는데 직원이 3D 안경을 주더군요.
    '뭐야, 내가 여기서 3D영화를 보는거야?' 봤습니다. 더빙만 안하는게 어딥니까. 헤헤.

    2011.03.06 22:33 [ ADDR : EDIT/ DEL : REPLY ]
    • 신도림에도 CGV가 있었군요. 어쨌든 조만간 킹스 스피치를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이젠 혼자 영화 보러가기도 싫고...따라서 갈 여건이 -_-

      2011.03.27 12:53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