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셔 선생님의 웰빙 라이프라는 재미있는 포스팅을 보고 켈로그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일단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극초반까지 이어진 건강에 대한 사고는 단순히 웰빙 열풍이나 사기로 폄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건강 사기꾼과 만병 통치약이 판을 친 시대이기도 했지만, 운명론이나 신의 은총에 머물렀던 건강의 문제를 과학 쪽으로 끌어당긴 시대였으며,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확대시킨 시대이기도 했다. 그 당시 삽질과 더불어 이루어진 진보의 혜택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예컨대 켈로그 박사의 다소 처치곤란한 위생론에 감화받고, 아낌없는 후원을 보낸 사람 가운데는 테디 루즈벨트와 록펠러 같은 거물이 있었고, 꼭 100% 사회 헌신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 결과 록펠러는 사재를 털어 뉴욕 상수도 시스템 기부하게 되었다. (지금도 뉴욕 상수도 시설과 요금의 상당 부분을 록펠러 재단이 후원하고 있다)

 이 시기 근대화된 세계(유럽) 전반이 새로운 과학과 진보된 의학 열풍에 휩싸였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특유의 청교도적 기독교 사상이나 종교적 도덕주의가 가미되어 독특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위생이나 건강에 종교적, 윤리적 의의를 가미했다고나 할까. 따라서 공중 위생의 문제는 단순히 공중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의식 개혁, 도덕 개혁, 종교 개혁적 요구를 동반했던 것이다. 새로운 의학 역시 이런 사명을 버려서는 안되었다. 이 시기 미국의 내노라하는 의학자, 약학자, 위생학자, 사회개혁가들은 근대화된 기독교의 사제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1830년대 가장 눈에 띄는 사회운동가(...라는 표현이 제일 적절하다. 영양학자라든가 과학자라든가 위생학자라든가 하는 표현은 다 뭔가 부족하다)는 Sylvester Graham 목사(사이비도 아니고 무려 장로회 목사님)였다. 그가 주창한 영양 개혁 운동(?)을 보면 좀 얼토당토 않은 내용(예컨대 케첩과 겨자를 먹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도 있지만 아직도 끈덕지게 되풀이되는 떡밥은 다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제분안된 밀(통밀)과 첨가제 없는 채식주의, 육식 금지(단순히 윤리적, 종교적 금지가 아니라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줘서 남성성이 흐려진다는 식), 엄격한 금주, 과도한 성행위(자위) 금지 등등. 
 그레이엄 목사의 운동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유사 사회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켈로그 박사도 그레이엄 목사의 추종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사실 육식이나 자위를 호르몬 분비에 엮어서 규제하는 설명 방식은 못마땅하지만 그레이엄 목사의 운동은 당시 사회 현실에서는 다소 바람직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그레이엄은 매일 양치질하고, 규칙적으로 샤워할 것을 자신의 건강법에 핵심 요소로 집어넣었는데 이러한 부분은 당시 미국 사회의 비위생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미국의 19세기 초반 식품산업은 복마전이었고, 육류와 유제품의 위생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러한 식품을 피하라는 주장은 이유야 어쨌든간에 개인 건강에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다. 더구나 당시 미국인들은 생과일과 채소를 거의 먹지 않았고, 성인 남성은 1년에 고도주를 23리터씩 마셨다. 채식과 금주도 나올만한 견해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 정도에 그쳤다면 건전하게 마무리될 수도 있었던 유사 종교-위생 개혁 운동은 제7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의사 John Harvey Kellogg의 보다 고품격 삽질로 이어진다. (사실 여기서 끝나지도 않았다. 이런 사조는 점점 더 막장화되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1876년 미시간 주 Battle Creek의 건강 위생 운동 시설인 Weston Health Reform Ins.를 인수하여 Medical and Surgical Sanitarium 이라는 시설을 세운다. 원래 시설은 망해가고 있었지만, 이제 의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종교 개혁가가 새 사업에 뛰어든 셈이다. Sanitarium이라는 허영기 넘치는 이름은 둘째 치고, 이 위대한 사업에 뛰어든 그의 나이 24세 - 아무리 전공의 과정이 없는 시대라지만 의학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런 엄청난 사업을 일으킨, 참으로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그레이엄 목사와 마찬가지로 그는 의학에 종교를 접목시켰다. 켈로그 박사가 평생 가장 경계했던 것이 육식과 자위행위였으며, 이런 행위들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켈로그 박사는 비교적 일찍 결혼했지만 부부 사이에 아이를 낳지는 못했고, 다수의 어린이들을 입양하여 키웠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악당이나 사기꾼은 아닌셈이다.) 위 포스팅에서 다룬 똥 이론 역시 켈로그의 독창적인 주장 속에 포함이 되지만, 켈로그 박사는 좋은 대학에서 학위를 따서 그랬는지 장관 절제술 같은걸 실행하지는 않았다. 관장과 변비약을 상용하고 자주 변기에 앉는 정도로 자제했으니, 이성적(?)인 셈이다. 하지만 피부염에 시달렸던 마라가 욕조 안에서 기고문을 쓴 것처럼, 대장 내 숙변과 투쟁하던 켈로그 박사는 바지를 까고 변기에 앉아서 논문을 구술했으니, 흉칙한 장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켈로그 박사가 주목한 것들을 보면 아직도 지속되는 여러 떡밥들이 보여서 흥미롭다. 켈로그 박사는 여러가지 질환에 대하여 장청소와 '(장래에 요거트라고 불리게 될) 불가리아식 유제품'을 처방했으며, 고혈압 환자에게 매일 6kg의 포도만 먹게 하는 요법도 실행했다. 요양원의 많은 환자들에게 자전거를 권유했으며, 반신욕을 비롯한 목욕을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 켈로그 박사가 권장한 영양 요법 중 오늘날 대중들이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피넛 버터 밖에 없는 것 같다. (사실 땅콩과 피넛 버터는 칼로리만 아니라면 아주 좋은 식품인데) 실로 떡밥은 이미 다 나와있었던 것이 아닌가. 켈로그 박사는 성경(레위기)에 나오는 금지된 식품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먹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이게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 제7안식일 예수재림교회란 한국의 삼육재단을 운영하는 그 종파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견해차(제7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미국에서도 주류적인 기독교 종파는 아니니까)야 어찌되었든 켈로그 박사의 요양원과 유사 종교적 영양-위생론은 당대 미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슬럼가와 교육 수준이 낮은 노동 계층에 애증을 품고 있는 엘리트 개혁론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테오도어 루즈벨트나 록펠러 같은 독특한 공화당원들도 그의 견해에 귀를 기울였다. 뒷날 종교는 목사에게, 의학은 과학자에게 넘어간 이후 발전된 연구 성과는 켈로그 떡밥을 분쇄하였지만, 켈로그 박사 활동 당대의 영향은 그와 별개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는데... 100년도 넘게 지속될 떡밥들을 줄줄히 생산했고, 급기야 톱밥 같은 콘 플레이크 따위도 만들었지만, 당시 미국의 현실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좀더 많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켈로그 박사의 최대 업적인 콘 플레이크는 다소 신화적인 일화들로 포장이 되어 있다. 한국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떠도는 뒷이야기는 콘 플레이크가 자위행위를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식품이라는 것인데, 켈로그 박사의 숙적이 자위이긴 했지만 시리얼을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켈로그는 평생 새로운 실험적 식품(예컨대 글루텐 크래커 같은)을 도입하는데 열을 기울였고, 시리얼은 그런 창작품의 하나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일화에 의하면 최초의 시리얼 제조법(통밀 밀가루를 끓여서 - 가늘고 길게 말아서 - 오븐에 바짝 굽는다)은 켈로그 박사의 꿈 속에 나타났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냐?) 하지만 밀가루 자체를 반죽해서 오븐에 굽는 것은 소위 하드택(항해용 건빵)의 제조법이며 굉장히 오래된 보존법이다. 밀가루 반죽이 아닌 오트밀(통밀 밀가루를 끓인 것도 하나의 아침식이었으니)을 오븐에서 건조시켜 고형화한다는 것은 이런 발상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 아닐까. 참고로 어떤 주장에 의하면 굳이 아침식인 오트밀을 고형화하는 번거로운 작업을 한 이유는 섭취량을 줄이려는데 있었다고 한다. 섭취량이 줄면, 대장 내의 숙변 량도 줄어드니까. 무서운 이유다.
 따라서 최초의 시리얼은 (맛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요양원 식사가 맛이 없었으면) 우유에 말아먹는 식품이 아니었다. 사실 켈로그 박사의 요법에서 유제품은 신통치 않은 식품쪽으로 분류되고 있었으니 애초에 우유에 말아먹기 위해서 만든 식품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인들의 유제품에 대한 편견은 유제품에 대한 정부 규제가 확립된 이후에 회복되었다. 그 전까지 생우유는 굉장히 위험한 식품으로 여겨졌다.) 섭취량 조절 (점점 칼로리 메이트같이 들린다)을 위한 식품이었으므로 (그리고 생산 단가가 비쌌을테니) 공급량도 많지 않았다. 요양원 내의 인기에 비해 환자들에게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켈로그 박사 요양원에 9개월째 머물던 한 청년이 쥐꼬리만큼 제공되는 시리얼에 불만을 품고 (공식적으로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쪽으로 개종하면서 - 고기는 실컷 먹겠네) 요양원을 떠날 때, 레시피(라고 할 것도 없다)를 들고 나가버린다. 이 청년의 이름이 C. W. Post. 이 젊은이는 켈로그 박사에게 라이센스를 받을 수 있을지 타진했지만, 요양원 측은 내부의 특별 건강식을 외부에 제공하길 꺼려했다. (더구나 켈로그 박사가 혐오하는 식품 산업의 대량 생산품이라니!) 그러자 포스트는 무단으로 시리얼을 제조하여 판매하기 시작, 순식간에 갑부가 되었다. (켈로그가 발명했지만 제품 출시는 포스트가 앞선 이유가 이것이다) 그 정도로 켈로그 박사 요양원의 건강식은 당대 미국인들의 구미에 맞았나보다. 최초로 포스트 사가 생산한 제품군 중에 가장 유명했던 제품명은 Elijah's Manna(엘리야의 만나)다. 여전히 유사 기독교 신앙은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시리얼 시장의 전망이 좋다고 느껴지자 1900년대 극초반에 벌써 배틀 크릭을 중심으로 44개의 시리얼 대량 생산 회사들이 난립했다. 배틀 크릭의 켈로그 박사 요양원의 브랜드 효과를 탈취하며 열심히 무단으로 생산해서 팔아치운 것이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미국도 별 수 없었다) 아침식사 대용 간편식이라기 보다는 비싼 요양원에 감히 갈 수 없는 켈로그 박사 추종자들이 주 소비자가 아니었을까. 비슷한 예로 1980년대 후반부터 잠시 유행했던 이상구 박사 열풍(그러고보니 이상구 박사도 제7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소속이었다) 때도 아스파탐류의 칼로리 제로 감미료가 이상구 브랜드 효과를 받으며 잘 팔렸던 사례가 있다.
 반면에 요양원 사업을 잘 하고 있던 켈로그 박사에게 식품 산업은 관심 밖이었고 결국 1907년까지 켈로그 박사는 시리얼 식품 제조업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1907년에 뛰어든 이후 켈로그 시리얼은 포스트와 더불어 양대 산맥으로 시장을 구축했으니...역시 원조의 힘은 무서운 법. 

 이후 건강식 유행에서 시리얼의 인기도 시들해지면서, 시리얼은 점차 아침대용 간편식으로서의 가치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레드 오션화된 건강식 시장에서 우유에 타먹는 시리얼은 사실 칼로리가 너무 높고, 비타민과 미네랄, 섬유질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에 따라 시리얼들이 달아졌다는건 재미있는 일이다. 켈로그 박사가 현재 켈로그에 설탕이 그렇게 많이 들어간다는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시리얼 시장 내에서도 영양소를 강화하고 섬유질을 충분히 넣은 건강용 시리얼 제품군들이 또 출시되고 있으니... 켈로그 박사가 개발한 최신 건강 식품 콘 플레이크의 역사는 기구하기만 하다.

TRIVIA

-켈로그 이전에 시리얼을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설들은 굉장히 많이 있다. 제7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를 따르는 James Caleb Jackson은 1863년 뉴욕의 요양원에서 Granula라는 시리얼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 켈로그의 Granula와 상표권 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유명해졌다. 결국 켈로그는 Granola로 상품명을 수정하는데, 이것이 바로 소녀시대도 선전하는 그래놀라다.)

-위 포스팅을 보면 알겠지만 켈로그 박사가 최초로 만든 것은 통밀을 이용한 wheat flakes다. 최초의 corn flakes는 켈로그 박사의 동생 W. K. Kellogg가 만들었다. 실질적으로 Kellogg Company를 세워서 켈로그 시리얼을 대량 생산한 공로는 동생에게 있다.

-켈로그 사의 본사는 여전히 미시건 주 배틀 크릭에 있다. 그러나 현재의 켈로그 사는 켈로그 家나 제7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무미건조한 다국적기업이다. 켈로그 박사가 요양원에서 괴상한 짓을 하고, 동생이 열심히 시리얼을 만들던 시대에는 좀더 인간미 있고 로컬한 기업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1985년까지 켈로그 사는 매일 6시간, 주 30시간 노동제를 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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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말을 조심하는 措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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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읽었습니다

    배경지식이 풍부하신듯하네요
    글도 굉장히잘쓰시고요
    짧은글은 아니지만 지루하지않게 흥미롭게 잘읽었습니다

    2012.04.11 16:31 [ ADDR : EDIT/ DEL : REPLY ]
  2.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런 배경지식들을 어떻게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참조 하신 reference를 알고 싶습니다. 특히 켈로그 박사에 대한 reference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다

    2015.02.06 23:1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