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 서양과 조선의 만남』, 박천홍, 현실문화연구, 2008)

 저자가 출간한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라는 책을 읽은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책 내용 중 일부를 수능이나 논술 시험을 준비하며 지문으로 접했다고 기억하는데, 이 포스팅을 준비하면서 되짚어보니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이 출간된 것은 2003년의 일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박천홍의 글은 지문에 올라갈 법 하다고 느낄만큼 수려했다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굳이 박사 학위나 교수직의 휘광을 두르지 않았더라도,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 역사서는 좋은 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자의 성실한 준비, 정직한 역사관이 오히려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박사 학위를 가지고도 악취를 풍기는 책들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이덕일을 보면 너끈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역사서는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학술서적뿐만 아니라 대중 교양서적도 근간에 좋은 책들이 다수 출간되고 있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경향은 사료가 많은 조선사나 근대사 분야에서 현저한데, 이런 무명의 양서들이 꼭 잘 팔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참 아쉽습니다.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는 2008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제가 읽은 것은 2년 하고도 반이 지난 시점이니 새삼 독후감을 쓰기에도 면구합니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 교양 서적이기도 했던 이 책을 이제서야 읽은 것은 당시에 관심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800쪽을 살짝 넘긴 분량에 질렸기 때문일까요. 뒤늦게 이 책을 읽으며 2년이 넘게 늦었다는 아쉬움을 곱씹습니다. 이 책 역시 수려한 문장으로 여러 사료들을 섭렵하며 방대한 분량의 독서를 수월하게 이끌어주고 있으니까요.

 사실 조선 후기에 관해서는 실학이라든가 쇄국과 개화, 천주교 신앙, 세도정치, 근대의 맹아 등 여러가지 포인트에 초점을 맞춘 교양서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양서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저술 자체를 다듬어서 현대역으로 출간한 책들도 많았고, 대부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 서적들과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크로스체크라는 점입니다.

 제주 출신으로서 어렸을 적에 하멜 기착지를 가본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약간의 미니어처와 기념비 뿐인 곳이었는데 꽤 오래 전 기사를 보니 그 표류지에 당대 네덜란드 선박을 1:1 스케일로 복원시켜놓는 사업이 진행 중이더군요. 그만큼 한국인들은 하멜을 꽤 친숙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박연의 사례처럼 하멜도 우리 조상들이 구휼해주고 잘 대우해준 '기록 상 아주 처음 만난' 유럽인이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멜표류기』(서해문집, 2003)를 읽어보면 당시 하멜이 13년이 넘도록 조선에 강제로 억류되어 있었고, 그 기간 동안 상당히 괴로워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교과서나 방송에서 피상적으로 '조선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것만 진실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조선 후기 조선과 서양의 접촉에 관하여 우리는 '조선의 기록'을 가지고 있고, 이 사료를 근거로 쓰여진 저술들을 읽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병인양요 등과 관련된 교과서 저술입니다. 많은 이들이 피상적으로 강화도에서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고 알고만 있죠) 그러나 같은 사건에 관한 '서양의 기록'에는 어두웠습니다. 이러한 사료들이 공개되었더라도 그것을 읽고, 연구한 범위는 학술서적의 전문가들 정도로 국한되었습니다.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의 매력은 이런 크로스체크가 확실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제목과 달리 (잘 뽑아낸 제목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이 책은 조선후기에 있었던 몇몇 이양선 사건을 중심으로 삼아서, 동일한 사건에 대한 조선과 서양의 기록을 교차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구화된) 근대 교육을 받은 우리는 서양의 기록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근대화의 진척만큼 전근대의 조선은 다소 타자화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까닭에 우리는 조선 시대 조상들의 후손이면서도 어느 정도 당대 조선과 서양을 제3자적인 시점에서 관찰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크로스체크를 통하여 당시 조선과 서양의 세계관과 생각을 대조해보는 것은 결국 조선의 관점에서 서양의 제국주의적 사고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반대로 근대인의 관점에서 조선의 쇄국주의적 사고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시대에 관하여 국정교과서에 서술된 하나의 관점이나, 혹은 국가주의에 매몰된 편벽한 시각만을 들이대는 역사 애호가들이 넘치는 시대에 이러한 책의 출간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를 끝까지 읽고 든 생각은 근대가 얼마나 조선에 가까이 왔었는가라는 아쉬움입니다. 신사의 얼굴을 한 제국주의라는 비판은 일리가 있지만, 근대화를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조류라고 인정한다면 조선에게 근대는 1800년대 초중반에도 제주도와 거문도 인근을 기웃거렸던 셈입니다. 이것은 양란 이후 혼돈과 모색 속에서 헤매던 조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회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막을 내렸으며 그 4년 뒤인 1880년대에는 근대화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30년 가량 늦은 것이었지요. 어쩌면 2011년에도 여전히 이 지각을 벌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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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말을 조심하는 措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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